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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할 길은 없지만, EPO의 힘으로 우승이 결정된 첫번째 대회는 아마도 1994년의 아덴 클래식 Fleche Wallonne으로 보인다. Greg LeMond와 Laurent Fignon은 둘 다 1990년대 초반에 EPO가 처음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LeMond는 펠로톤의 속도가 눈에 뛰게 증가한 1991년을 지목한다. 그러나 1994년은 완전히 달랐다. Fleche Wallonne에서, Gewiss-Ballan 팀은 치고 나간 선수들을 모두 따라잡고 경기를 완전히 지배하고, 결국 나머지 선수들이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만들면서 팀 소속의 세 선수 Moreno Argentin, Evgeny Berzin, Giorgio Furlan가 차례로 1,2,3위를 차지하였다. 엄청난 경기력이었고, 많은 의문과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Berzin은 4일후 Liege-Bastogne-Liege도 우승하였고, 바로 뒤이은 Giro에서는 3개의 스테이지를 승리하며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Berzin에게 의혹이 계속 제기됐고, 1999년에는 프랑스 선수인 Erwann Mentherour가 도핑을 폭로한 책인 Secret défonce: ma vérité sur le dopage의 고발을 변명해야 했다. Berzin은 그 후 10년간 1994년의 영광을 되돌이키기 위해 고생한 후,  1999년에 컴백했다. 2000년 Giro에서 헤마토크리트 수치가 50%를 넘어서 추방된 후, 바로 은퇴했다.

 1994년 Fleche Wallonne가 끝난 후, 기자가 팀 닥터인 Michele Ferrari에게 EPO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Ferrari의 답변은 자전거 계에 전해지는 유명한 어구가 됐다. "한 명만 사용했다면 그건 스캔들이 아니다. EPO 자체가 위험한 게 아니라, 남용이 위험하다. 오렌지 주스 10리터를 마시는 것도 똑같이 위험하다." 

Ferrari의 말은 90년대 프로 사이클 계의 두 가지 조류를 함축한 것 같다. 첫번째 조류는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춰야 하는 힘든 자전거 경기에서 회복이나 성공적인 경력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약물이 폭넓게 계속 사용됐다. Alex Zulle가 Festina 사건에서 자백한 후 이야기한 바와 같이, "운전과 비슷하다. 법은 100Km/h의 속도 제한이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120Km/h로 운전한다. 왜 나만 속도 제한을 지켜야 하나? 그렇다면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거기에 맞춰 다른 사람들과 맞춰가거나, 페인트 공으로 돌아가야 한다."

 두번째 조류는 약물 사용이 팀 보조의 손에서 의료 전문가인 의사의 손으로 옮겨갔다. 이는 도핑이 점점 더 전문화되고, 자전거 뿐만 아니라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선수의 경기력을 끌어올리려는 스포츠 계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볼 수 있다.

John Hoberman은 Testosterone Dreams에서 이런 조류를 선수들이 경기력을 향상시키려는 문제로 요약한다. Hoberman은 동독의 Sports Medical Service(SMD)의 전직 의사였던 Manfred Hoppner의 1990년대 언급을 인용한다. "우리가 뒤로 물러나 있으면, 선수들이 직접 하거나, 돌팔이 의사들에게 그 자리를 넘겨줄 뿐이다." Hoppner는 계속해서 의사들이 "의약적으로 허용된 분량의" 약물로 "빠른 회복과 강한 내성"을 촉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Hopner는 이후 유소년을 비롯한 선수들에게 신체적인 손상을 가한 협의로 유죄를 선고 받았다.)

불명예스러운 스프린터인 Ben Johnson의 코치였던 전직 캐나다 트랙 코치 역시 선수들을 강화하는 데 찬성한다. 1991년의 책인 Speed Trap에서 도핑의 건강상 위험을 간과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숙하며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진 엘리트 선수가 자신의 경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스테로이드를 사용해야 하고 건강상 위험 없이 그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프로 사이클 선수의 처지에 대해 동정론도 있다. Hoberman은 독일 기자와 의사들의 언급을 인용했다. "누구도 타오르는 열, 얼어붙는 듯한 추위, 눈과 비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선수들에게 자신들에게 가용한 통증 완화 수단의 포기를 진지하게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Ferrari는 Gewiss 팀의 동조를 받지 못 하고, 해고됐다. 이후 Argentin이나 Berzin에게 사적으로 고용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많은 유명한 선수들과 같이 일했다. 가장 유명한 선수는 Lance Armstrong이다.

그럼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 본것처럼, Pantani에게 1994년은 폭발과도 같은 해였으며, 또 다른 놀라운 승리를 앞두었지만 헤마토크리트 수치를 통과하지 못하여 Giro에서 축출당한 1999년까지 그의 경력은 말 그대로 하늘까지 치솟아 올랐다. 컴백한 2000년에 무언가를 보여줬지만, 그 후에는 사라져 버렸다. 별빛 같은 경력이었다. 그러나 Pantani의 이런 엄청난 시절이 단지 자전거 계에서 가장 심한 도핑을 했기 때문이라면 어떨까?

저술가인 Matt Rendell의 자서전 또는 폭로인 The Death of Marco Pantani는 놀라운 책이다. Rendell은 1996년 Pantani의 입원, 1999년 Giro에서의 축출, 1990년대의 EPO 연결망을 폭로한 Conconi 교수의 재판의 세세한 기록을 통해 증거를 수집했다(1부를 참조). 증거에는 Pantani를 비롯한 선수들의 헤마토 크리트 수치를 보여주는 Conconi의 스포츠 연구소의 컴퓨터 파일이 포함되어 있다.

Rendell의 결론은 냉정하다. "Marco의 전체 선수 경력은 [EPO] 남용에 근거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Rendell은 많은 자료를 근거로 Pantani의 헤마토크리트 수치가 1994년과 1996년 사이에 40.7에서 60.1로 급격하게 변하였음을 보여준다. 1997년 6월에는 47.2였다. 1998년 투르 전에는 49.3이었으며, 그해 7월에는 45.7로 떨어졌다. 1996년과 1997년 초반에는 수치가 빠져 있지만, Pantani의 나머지 선수 생활 기간에는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나는 높은 수치를 보여주었음을 보여주며,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선수 생활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1998년에서 1999년 6월 5일까지 무언가 다른 것에 의존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게 타당하다."

Pantani의 오르막의 승리와 Alpe d'Hhez의 기록이 약물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 그러나 Alpe d'Huez의 37분 35초 기록은 앞으로도 몇 년간 깨지지 않을 것 같다. 2004년 Lance Armstrong은 1초 차이였다. Armstrong의 타임 트라이얼 능력이 아주 뛰어나고, 스테이지 전에 잘 쉬고 완벽하게 웜업했다는 걸 생각한다면(긴 스테이지의 막바지도 아니었고), ITT에서 Pantani의 최고 기록을 깨지 못 한다면 앞으로도 그 기록은 깨는 게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정확한 시간이나 출발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최고 기록은 대체로 이견이 없다. Pantani는 최고 기록에서 1위, 3위, 5위를 차지하고, Armstrong이 2004년의 2위(37분 36초)와 2001년에 4위(38분 01초, Pantani의 1995년 38분 04초 기록에 단 3초 앞선)를 차지했다.

실제로, Frank Schleck은 80년대 후반 이후 40분이 넘겨 우승한 첫 번째 우승자였다. 심지어 지난 해 가장 빠르게 올랐던 Floyd Landis와 Andreas Kloden도 Pantani에 1분 이상 뒤져 있다. 이제 10년이 넘은 이 기록을 깨뜨리려면, 가장 경쟁이 심한 투르에서 또 다른 ITT가 있길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사이클을 사랑하는 팬은 무모한 어택과 가장 힘든 오르막을 완전히 압도하는 Pantani의 클라이밍 능력에 놀라고, 심지어 감동받는다. 그는 산악의 열정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의 경기력은 매혹적이다. 1998년 Pantani의 승리 이후, 프로 경기에 널리 퍼진, 조직화된 도핑을 폭로한 Festian 사건에도 불구하고 Pantani 자신의 경기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언론의 객관성이 눈에 띄게 부족한 상황에서, Volonews의 편집자인 John Wilcockson은 Conquest and Crisis: The 1998 Tour de Frane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Bravo, Marco! 당신의 용기는 투르를 구하였다."

그렇다면 Rendell의 결론을 부정할 수 있을까? Pantani는 놀라운 경기력을 지탱한 약물 때문에 뛰어났을 수도 있고, 승리자의 정신력 때문에 뛰어났을 수도 있다. 이렇게 긴 도핑의 역사 속에서, 그렇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1990년대 사이클 계의 도핑에 대한 과거와 미래의 폭로가 증언해 주는 바와 같이 Pantani와 약물과의 독특한 경우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이야기, 비극은 너무나 독특하다. 가장 높은 곳까지 날아오르고, 절망 속으로 추락하기 전에 버림 받고, 결국에는 자살한다. 그는 EPO라는 메피스토텔레스, 의사들, 프로 경기의 압력으로 파우스트의 계약을 했을까? (Pantani는 자전거계의 Dorian Gray일까?) 그가 얻은 엄청난 클라임 파워에 대한 거래 대가일까? 아주 비싼 가격의?
 
Pantani는 그의 거래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언론에서의 발언은 기록 향상에 대한 여러 문제에 대한 Pantani의 의견을 간명하게 요약해준다. "자전거 계에는 도핑이라는 문화가 없다. 다만 챔피언의 문화가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자기 향상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도핑은 금지되어 있지만, 도핑이 자신을 잡아챌 때만 금지될 뿐이라는 의미다."


그의 유산은 사진과 필름 속에서 그대로 남아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산악을 날아오르는 Pantani의 놀라운 광경은 우리 옆에 남아 있다. 37분 35초의 Alpe d'Huez의 기록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몇 년간 깨지질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산은 얼룩져 있다. 장대한 비극의 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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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 이 글은 HanDDol이 http://le-grimpeur.net/blog/archives/13 의 글을 번역한 글입니다. 이 글의 URL은 http://cyclingpedia.tistory.com/entry/DopingClimb3 입니다. 저작권에 문제가 있을 수 있으므로 다른 곳에 옮기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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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 작성 : 200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