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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의 한 세기

 

모든 것은 1905년, 투르의 운영위원장인 Henri Desgrange가 경기 코스에 사상 최초로 산악 언덕인 Ballon d'Alsace을 포함시키면서 시작되었다.

 

1905년 투르 드 프랑스에는 두 가지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속임수 방지가 강화되었고, 다른 하나는 경기를 가능하면 더 힘들게 만든 것이었다. 처음 두 투르는 선수의 지지자들이 경기에 개입하고, 어떤 라이더는 차를 얻어타고 가면서 엉망이 되버렸다. 투르의 위원장인 Henri Desgrange는 이런 문제을 없애기 위해서, 경기의 우승자를 시간이 아닌 포인트로 결정하게 했다. 또 경기를 힘들게 만들기 위해 사상 최초로 라이더를 산악 오르막을 넘도록 하는 결정을 내렸다.

라이더들은 프랑스 북동부 Vesges 산맥의 일부인 Ballon d'Alsace를 2005년 투르의 스테이지 10으로 다시 오르지만, 1905년보다는 훨씬 더 나은 장비로 넘게 된다.

 

걸으리라는 예상

Desgange는 부분 부분 10%에 이르는 경사도를 가진 Ballon 전체를 자전거를 탄 채 페달을 밟으면서 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예상했다. 물론 1905년 시절의 가장 가벼운 자전거가 20Kg에 달하고, 가변 기어가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예상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Ballon을 넘어가는 도로는 오솔길보다 약간 나은 정도였다. 라이더들은 Desgange가 이상적인 투르의  목표로 생각했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직 한 명의 라이더만이 파리의 결승점을 통과하도록 만드는 곳".

그러나 그는 기술적인 혁신과 선구자적인 투르 선수들의 결단을 고려하지 못 했다. 가장 나은 선수들은 오르막 아래에서 가장 낮은 기어를 가지고 오르막에 맞게 아주 가볍게 만든 자전거로 바꿔 탔다. 물론 이 자전거는 평상시 사용하기에는 완전히 부적합했다.

경기가 거기까지 진행된 것은 아주 놀라왔다. 첫번째 스테이지가 끝난 후 Desgange는 대회를 포기할 걸 고려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처음 두 대회에서 열광적인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선수를 지연시키고, 펑크를 일으키게 도로에 못을 흩어놓고, 경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많은 다른 많은 방법을 공모했다. Desgange는 투르를 포인트 제로 바꾸게 되면 팬들이 라이더를 지연시키려고 하지 않을 걸로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파리에서 Nancy까지의 첫번째 스테이지에서 못으로 인한 수많은 펑크를 볼 수 있었다.

Desgange는 완전히 격노했지만, 결국에는 경기를 계속하게끔 설득 당했다. 다음 날 임시적이긴 하지만 팬들의 개입은 멈췄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전년 투르 우승자인 젊은 프랑스인 Cornet이 Ballon d'Alsace의 기슭에서 어택하는 진정한 스포츠다운 경쟁을 보게되었다. 같은 프랑스인인 René Pottier만이 그를 따라갈 수 있었고, 잠시 동안 둘은 거의 붙어서 언덕을 올랐다. 그 후 Pottier가 어택하고, Cornet은 그에 대응할 수 없었다. Pottier는 조금씩 자신의 경쟁자와 거리를 벌렸고, 오르막의 정상에 홀로 도달하였다. 그는 Ballon을 시속 20Km라는 놀라운 속도로 올랐고, 한 번도 오르막에서 자신의 자전거에 내려서 걷지 않았다.

 

Pottier의 전주곡

그것은 놀라운 기록이었지만, Pottier를 파멸시켰다. 결국 내리막에서 투르 최종 우승자인 Hippolyte Aucouturier에게 따라잡혔고, 이후 경기에서 기권하였다. 그러나 Pottier의 1905년 경기는 다음 해의 전주곡이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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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 대회에 이제는 익숙해진 완만한 정상인 Ballon d'Alsace가 다시 포함되었다. Pottier는 다시 한 번 정상에 제일 먼저 올랐고, 이번에는 Desgrange가 탄 선도 자동차도 앞질러 버렸다. 내리막에서 계속 선두를 지켰고, 스테이지에서 승리하였다. 그후 4개의 스테이지를 더 우승하였다. 특히 두번째 산악 스테이지에서는, 알프스 산맥의 Bayard와 Laffry에서 모두를 떨쳐내고 너무 앞선 나머지, 잠시 멈춘 후에 카페에서 45분간 쉬면서 나머지 선수가 그를 따라잡길 기다렸다. 선수들이 도착하자, 다시 다른 모든 선수를 따돌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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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에 타이틀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언론은 그에게 투르 역사상 최초의 산악왕(King of the Mountains)이라는 이름을 안겨주었다. 불행히도 이 타이틀은 무뚝뚝한 프랑스인에게 그다지 기쁨이 되지 못 했고, 연애에 실패한 후 다음 해 겨울 푸조 자전거 공장에서 목매단 채로 발견되었다. René Pottier는 산악에서 승리하였지만, 사랑에서는 패배하였다. 1908년 Pottier를 기리는 기념물이 Ballon d'Alsae의 정상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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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 이 글은 Cycle Sport의 투르 2005년 기념 기사 중 일부를 HanDDol이 번역한 글입니다. 이 글의 URL은http://blog.naver.com/handdol/50008006216 입니다. 저작권에 문제가 있으므로, 다른 곳에 옮기지 말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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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의 이력

 - 처음 작성 : 2006. 8.28